화 한 번 안 냈는데그 사람과 할 말이 없어졌다면
화를 참으면 관계가 지켜진다고 믿기 쉽지만, 말하지 않은 화는 '여기까지가 나'라는 선을 알리지 못하게 해서 아무 사건 없이 관계를 식게 만들기도 합니다.
한 번도 싸운 적 없는 관계를 좋은 관계의 증거로 여기기 쉽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요즘 그 사람이 내 얘기를 안 듣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고, 그렇게 말해 볼까 하다가도 "말하면 싸우게 될 텐데" 하며 삼키게 됩니다.
화에 대한 흔한 설명은 둘입니다. 참으면 관계가 지켜진다, 참으면 쌓였다가 언젠가 터진다. 그런데 실제로 더 흔한 것은 한 번도 터지지 않았는데 관계가 이미 식어 있는 경우입니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짚지 못합니다. 짚을 사건이 없었으니까요.
게슈탈트 상담에서는 나와 상대가 서로 다른 사람이라는 것이 또렷한 채로 마주 서 있는 상태를 '접촉', 그 또렷해지는 선을 '경계'라고 부릅니다. 화는 관계를 끊자는 신호가 아니라 "여기까지가 나다, 방금 그 선을 넘었다"를 알리는 일입니다. 화를 삼키면 취소되는 것은 화가 아니라 선을 알리는 일입니다. 상대는 선을 넘은 줄 모르고 같은 자리를 다시 밟고, 참는 쪽은 한 걸음씩 물러섭니다.
말하지 않은 화는 혼자 진행되는 재판이 되기도 합니다. 상대는 자기가 피고인 줄도 모른 채 판결을 받습니다. 참은 쪽은 자신이 관대했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상대에게 고칠 기회를 주지 않고 관계를 혼자 정한 셈입니다.
그렇다고 참은 사람을 탓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화를 내는 것이 곧 결별로 이어졌던 경험이 있는 사람에게, 화는 관계 전체를 건 도박입니다. 참은 것은 관계를 지키려는 가장 간절한 선택이었습니다. 다만 그 사람과 가장 가까웠던 때를 떠올려 보면, 아마 서로 조금 불편한 말을 주고받은 다음이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