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는 말이위로가 안 될 때
몇 년이 지나도 문득 슬픔이 올라오는 것은 애도에 실패했다는 뜻이 아닙니다. 슬픔은 사라지기보다 머물 자리가 정해지고, 떠난 사람과의 관계는 끝나기보다 모양을 바꿔 이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소중한 사람을 떠나보내고 몇 해가 지났는데, 그 사람이 좋아하던 물건이나 냄새 앞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는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곧 이런 생각이 따라옵니다. "이만큼 지났는데 나는 왜 아직 이러지."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어느새 위로가 아니라 기한처럼 들리는 것입니다.
우리는 슬픔이 크게 밀려왔다가 잦아들고 언젠가 끝난다고 배웠습니다. 그 그림 안에서는 몇 해 뒤의 눈물이 '아직 끝내지 못한 작업'으로만 읽힙니다. 그런데 실제로는 일도 하고 친구와 웃으며 지내는 날이 대부분인 경우가 많습니다. 남은 것은 어떤 가게, 계절이 바뀔 때의 냄새, 지우지 못한 연락처 같은 몇 개의 자리뿐입니다.
애도를 '작업'으로 설명한 프로이트도 열두 해 뒤, 아들을 잃은 동료에게 보낸 편지에서 급한 슬픔은 가라앉아도 우리는 끝내 다 위로받지 못한 채 남으며, 그것이 놓고 싶지 않은 사랑을 이어 가는 방법이라고 썼습니다. 1990년대 이후 유족 연구에서도 떠난 사람과의 끈을 끊어야 건강한 애도라는 전제가 실제 삶과 맞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지속되는 유대'라는 말이 쓰이기 시작했습니다.
반대로 슬픔이 옅어지면 잊어 가는 것 같아 두려워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떠난 사람의 얼굴이 흐려지는 동안, 그 사람이 하던 말투나 손버릇이 어느새 내 몸에 배어 있는 것을 발견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잊어 가는 과정이라기보다, 붙잡고 있던 기억이 몸에 밴 방식으로 옮겨 가는 과정에 가깝습니다.
몇 해가 지나도 하루 전체가 멈춰 있는 슬픔이라면 결이 다릅니다. 그때도 제가 먼저 보는 것은 지난 시간의 길이가 아니라, 슬픔의 둘레에서 삶이 다시 움직이고 있는가입니다. 기간은 슬픔을 재는 자로는 너무 거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