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한 것도 없는데자꾸 나를 탓하게 된다면
이유 없이 자신을 탓하는 습관은 자존감이 낮아서만 생기지 않습니다. '내 탓'이라는 설명이 알 수 없는 일 앞에서 까닭과 통제감을 대신 주기 때문에 오래 유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일이 틀어진 날, 결정한 사람은 따로 있었는데도 밤새 떠오르는 것은 내가 실수한 작은 장면입니다. 친구의 답장이 늦으면 지난번 농담을 되짚고, 상사의 표정이 굳으면 아침 인사를 어떻게 했는지 떠올립니다. 잘못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됩니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라", "근거를 따져 보라"는 조언은 잘 통하지 않습니다. 이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대개 반박을 누구보다 잘합니다. 논리로 이길 수 없다는 것은 애초에 논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괴로운 일을 몇 년씩 하고 있다면, 그것이 무언가를 하고 있다고 보는 편이 맞습니다.
상사가 왜 차가웠는지, 친구가 왜 뜸해졌는지 우리는 대개 알 수 없습니다. 그런데 "내가 잘못해서"라는 설명은 언제든 꺼내 쓸 수 있고, 원인이 나라면 고칠 수 있는 사람도 나입니다. 자기비난은 벌이면서 동시에 계획입니다. 정신분석가 페어베언은 이것을 '도덕적 방어'라고 불렀습니다. 아이는 부모를 나쁜 사람으로 두기보다 자기를 나쁜 아이로 만들어 자기가 사는 세상을 지킵니다.
그래서 이 탓은 그냥 걷어내면 안 됩니다.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라는 말 뒤에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는 무력감과 슬픔이 올라오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탓하는 동안에는 오지 않던 슬픔이, 탓할 이유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에 비로소 찾아오기도 합니다.
상담에서는 자기비난이 틀렸다고 증명하기보다, 그것이 그동안 무엇을 맡아 왔는지 먼저 봅니다. 이 탓을 내려놓으면 누가 나쁜 사람이 되는지. 그 답이 보이면 자기비난은 타고난 성격이 아니라 오래전에 내린 결정이 되고, 결정은 다시 할 수 있습니다.